아직도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 아현뉴타운 세입자 주거이전비 집단소송을 진행하며
<사진: 건너편 공덕동에서 바라본 아현동의 밤. 다른 곳과는 달리 가로등 말고는 불빛이 없다.>
지난 5월 16일 관리처분인가가 떨어진 아현뉴타운(아현3구역)은 지금 유령도시로 변했다. 주민들 대부분은 이미 이주를 마친 상태.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골목길에는 간혹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청소년들만 눈에 띈다. 그 대신 주민들이 이주하며 버리고 간 온갖 쓰레기와 부서진 건물 파편만 나뒹굴고 있어 한낮인데도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사진 : 온갖 쓰레기로 가득찬 아현동 골목길>
사회당 마포구위원회에서는 지난 7월 이곳 주민들을 대상으로 뉴타운 실태조사를 벌인 바 있다.(관련기사 : “멀쩡한 내 집 뺏기고, 난 어디로 가나”) 그리고 지금 이를 바탕으로 세입자 주거이전비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다행히 지난 10월 15일 서울행정법원에서 희망적인 판결 하나가 내려졌다. 서울행정법원(2008구합26916)은 “사업시행인가일 당시 재개발사업 시행지구 안의 주거용 건축물에서 3월 이상 거주한 세입자로서 재개발사업의 시행으로 인하여 이주하게 된 경우에는 주거이전비의 지급대상이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지금까지 서울시와 각 재개발 조합에서 정비구역 지정 공람·공고일을 기준으로 주거이전비를 지급하는 탓에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해야만 했던 세입자들은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전기 계량기 밑에 작은 메모가 붙게 된 사연
이민수씨(66세, 가명)는 아현동이 제2의 고향이다. 스무 살이 채 안 돼 이곳으로 온 그는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돈을 모아 지금의 4,000만원짜리 전셋집을 얻었다. 그 때가 2006년 10월 2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주거이전비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한다.
“빨리 이사를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돈이 있어야 이사를 가죠. 이 집 전세금 빼서 우리 4식구 들어갈 전셋집을 서울 어디서 구해요”
<사진 : 이민수씨가 살고 있는 집>
돈이 없어 이사를 가지 못한 이민수씨는 그간의 집주인 횡포에 치를 떨며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집주인이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계약기간 이후로는 하루에 15000원씩 제하겠읍니다”
“저번에 말했듯이 2일 날에 전기, 가스, 물 다 끊으니 그렇게 아세요”
<사진 : 집주인이 보낸 문자>
실제 이민수씨 집에는 그동안 수차례 전기와 가스가 끊겼다. 그때마다 이민수씨는 한전이며 도시가스며 직접 전화해 아직 사람이 살고 있으니 당장 원상복구 하라고 항의했다. 그리고 계량기 밑에 메모를 남겼다.
“현재 살고 있습니다. 철거 시 연락주세요”
<사진 : 이민수씨가 계량기 밑에 붙여둔 메모>
이민수씨도 이제 조금 있으면 이사를 간다. 다행히 며칠 전 대출을 받아 자양동에 집을 구했기 때문이다. 지하 전셋집이다. 그래도 한결 마음은 편한 듯했다. 그러지 않아도 사람이 없어 무서운데 밤만 되면 조합에서 고용한 용역들이 골프채 휘두르며 빈집 유리창을 죄다 부수고 돌아다니는 통에 딸자식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이민수씨는 세입자 주거이전비 집단소송을 신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이야 힘도 없고 법도 모르는데, 좋은 판결이 날 수 있다 하니 그나마 희망이 생기죠”
법원의 판결이 불만인 서울시와 마포구청
사실 이번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그저 1심 재판의 결과일 뿐, 주거이전비를 제대로 받지 못한 세입자들에게 확실한 희망이 될 수 없다. 항소와 상고를 통해 언제든지 뒤집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벌써부터 내부단속에 들어갔다. 서울시는 각 지자체에 보낸 공문(서울시 주거정비과-17538, 2008년10월 23일)에서 “세입자 주거이전비 보상과 관련하여 행정소송이 있었으나, 주거이전비 지급대상 기준일을 현재와 같이 정비구역 지정을 위한 공람·공고일로 적용하여 업무처리 할 것”이라며 지침을 내렸다.
마포구청도 마찬가지다. 사회당 마포구위원회의 “아현3구역재개발조합에 대한 세입자 주거이전비 행정지도 요청 건(2008년 10월 22일)”에 대한 회신에서 “행정법원 1심 판결 만으로 즉시 적용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니 현재와 같이 정비구역 지정을 위한 공람·공고일로 적용하여 업무 처리토록 할 방침”이라며 이번 판결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집단소송에 테러를 가하는 조합
이번 법원의 판결과 주민들의 집단소송 움직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극렬하게 저항하는 세력은 다름 아닌 재개발조합이다.
정당법 제30조(활동의 자유)에 따라 부착된 사회당 마포구위원회의 플래카드는 단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무단으로 철거되고 말았다. 그리고 하루에도 수 십 차례 사무실과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당장 소송을 중단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윽박지르며 협박하고 있다.
<사진 : 세입자 주거이전비 집단소송 홍보 현수막>
<사진 : 조합에서 보낸 협박 문자>
세입자들의 한숨을 대가로 집주인이 행복할 수 있나
그래도 그 중에는 점잖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집주인도 있다. 자신들의 고충도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뭐 공짜로 아파트를 얻는 건가요? 우리도 뼈 빠지게 돈 벌어 집 장만했고, 이제 또 대출까지 받아가며 새 아파트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래도 이제 곧 좋은 집이 생긴다는 생각만으로 부푼 꿈을 꾸고 있는데, 저희들 입장도 이해해 주셔야죠”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이들도 열심히 돈 벌고 대출까지 받아가며 새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곳의 조합원 분양가는 23평형이 평당 1,300만원으로 2억9,900만원에 이른다. 집주인이 이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1억2,000만원 이상의 추가금을 내야 한다.
<사진 : 이곳에서 25평형 집을 사려면 프리미엄 1억2,000만원을 더 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입장과 꿈을 위해 세입자들의 권리는 무시돼도 좋은가. 그렇지 않다. 세입자의 한숨을 대가로 한 집주인의 행복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입자들의 집단소송을 방해할 게 아니라 건설사와 토건정부에 항의해야
세입자들이 주거이전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나 집주인들이 엄청난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은 전적으로 엄청난 개발이익으로 폭리를 취하는 건설사와 이를 비호하는 토건정부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건설사가 개발과정에서 로또식 택지공급과 고무줄 건축비 등 온갖 불법과 탈세로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지난 2004년 서울시에 의해 처음으로 분양원가가 공개된 마포구 상암7단지의 경우 ‘40% 폭리’가 밝혀진 바 있다. 또 같은 해 건설사 출신의 김양수 한나라당 의원은 “대리석으로 도배를 하고 금으로 도장한 최고급 내장재를 써도 평당 3백50만원이면 남는다”며 양심선언을 했었다.
결국 이들이 취하는 폭리를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면 세입자들도 그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받을 수 있고 집주인들도 빚더미에 올라앉지 않고도 그들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행복한 주거권 보장을 위해
<사진. 아현동을 떠나며 남은 주민들에게 써 놓은 글>
이미 아현동을 떠난 한 미용실 앞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
“재개발로 인해서 폐업합니다. 그동안 저희 미용실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부자되세요~”
이 글을 써 붙인 미용실 주인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떤 행복을 꿈꾸고 있을까. 또 아현동을 떠난 다른 모든 이들은?
힘없는 세입자들이 자신들의 권리인 주거이전비를 제대로 받는 일은 모두가 행복한 주거권 보장을 위해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이제 그 조건을 세입자들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