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50일 만의 일이다. 7일 사회당 마포구위원회는 마포구 주민 210명의 서명을 받아 ‘마포구의회의 혈세 관광 및 표절 보고서 사건에 대한 주민감서청구서’를 서울특별시장에게 제출했다. (관련기사: 마포구의회 공무국외여행 보고서, 위키백과 베껴)
주민감사청구란 지방자치단체와 그 장의 권한에 속하는 사무 처리가 법령에 위반되거나, 공익을 현저히 해하는 경우 ‘일정한 수 이상의 주민’의 연서를 받아 주민이 직접 감사를 청구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는 주민의 직접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지방자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2000년 국가가 법으로 보장한 주민의 권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는 주민발의(2000년), 주민투표(2004년), 주민소송(2006년), 주민소환(2007년)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틀을 꾸준히 갖춰왔다.
그런데 이게 막상 해보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필요한 연서인 수가 많다. 마포구의 경우 200명 이상의 연서를 받아야 하는데, 정당이나 시민단체 등의 조직을 통하지 않는 이상 개인으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연히 무용지물이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 대전시와 제주도는 2000년 이 제도가 마련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주민감사 청구도 없었다. 다른 시․도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으며, 그나마 서울시가 32건(2007년 기준)으로 제일 많다.
서명 받으러 갔다가 가게에서 쫓겨난 사연
서명을 받다보면 주민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물론 다들 미친놈들이라며 구의원들 욕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게 뭐 어제오늘 겪은 일이냐며, 혹은 서명한다고 뭐 달라지냐며 등을 돌리고 만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들만 서명하겠다며 펜을 달라고 한다. 대략 2~30%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럼 이렇게 펜을 건네받은 사람들은 과연 무사히 서명을 마칠 수 있을까. 아니다.
하루는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서명을 받고 있었다. 한 슈퍼마켓에 들어갔는데 주민들이 예닐곱 사람 정도 모여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 좋을 것 같지만 이런 경우 대부분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입씨름만 벌이다 말기 일쑤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단 발을 들였으니 시도해보는 수밖에.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나의 설명을 쭉 전해들은 주민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서명을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의견은 팽팽했고 나는 결국 이러고 말겠구나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께서 내게 펜을 달라고 하셨다. 나는 옳거니 하고 펜을 드렸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 서명판을 뚫어지게 보시더니 나에게 고개를 들고 다짜고짜 큰소리를 치신다.
“아니 주민등록번호를 쓰라고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줘. 당신 사기꾼 아니야! 서명이고 뭐고 당장 나가!!”
그렇다. 최후의 복병은 주민등록번호였다. 서명을 하겠다고 나선 분들도 절반 이상은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손사래를 친다. 결국 이 날도 오후 한나절을 발바닥에 땀나도록 돌았지만 서명을 받은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이런 망할 주민등록번호 같으니!
서명자 식별을 위해서라면 주소와 생년월일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구태여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주민들의 정치 참여와 권리 행사를 가로막는 현실을 불러온다. 이는 주민 참여를 통한 지방자치 발전이라는 주민감사청구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는 일이다.
더구나 몇 해 전에는 한 자치구가 주민감사 청구한 주민들이 실제 감사청구 서명에 참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겠다며 행정전산망의 주민등록번호를 활용하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는 공무와 직접적 관계가 없는 일에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 신상을 파악할 수 없도록 한 현행 주민등록법 규정에 위배되는 처사이다.
선거법 위반이다?
어렵사리 서명인수 200명을 거의 채워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난데없이 마포구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선거법 위반 제보가 들어왔으니 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그 다음 주에 선관위 조사를 받았고, 그 결과 ‘공명선거 협조요청’이란 공문을 받게 되었다. 공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하는 “마포구의회 혈세 관광 및 누더기 표절 보고서 사건”이란 내용의 입후보 예정자에게 불리한 사실이 게재된 유인물에 관광 당사자인 현직 구의원 6인(마포구의원 박영길, 정해원, 신봉현, 김영신, 고창훈, 홍은희)의 성명 및 유인물 배부자인 사회당 마포구위원장인 자신의 사진과 성명이 게재된 유인물을 지역구민에게 배부하였는바, 이는 선거일전 180일 전에는 공직선거법 제254조에, 선거일전 180일 부터는 같은 법 제93조에 위반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 주의하여 주시기 바라며 공직선거법 등 정치관계법을 준수하여 공명선거 풍토정착에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공직선거법 제254조(선거운동기간위반죄)에는 선거운동기간 전에 각종 인쇄물을 사용한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으며, 제93조(탈법방법에 의한 문서․도화의 배부․게시 등 금지)에는 선거일전 180일 이후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인쇄물 등의 배부를 금지하고 있다.
결국 차기 지방선거 입후보 예정자인 현직 구의원에게 불리한 사실이 게재된 유인물을 배부한 것이 문제란 말인데, 황당하다. 지방선거 입후보 예정자에게 불리한 사실이란 엄연히 그들 스스로 저질렀던 잘못이다. 애초에 선거에 불리한 일이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잘못은 그들이 저질로 놓고, 그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에게 다른 잘못을 묻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럼 그들의 잘못은 누가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솜방망이 처벌은 이제 그만!
주민감사청구는 접수되었지만, 이제는 결과가 걱정이다. 지난 2007년 한 자치구의 경우 공무국외여행 감사에서 타당성 검토 미흡, 해외연수 목적과 귀국보고서 부적합, 여행경비 지출 부적정 등이 지적됐지만 실제 취해진 조치는 시정 3건, 훈계 2건, 주의 2건과 함께 28만 6500원 환수가 전부였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주민감사청구는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사실상 주민소송을 가기 위한 과정으로만 치부되고 만다. 이럴 거면 주민감사청구라는 제도를 둘 필요가 없다. 하기는 힘들고 실효성도 없는 걸 누가 하겠나.
부디 이번에는 실효성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기 일처럼 나서준 염리동 사임당 미용실 아주머니, 어린이책시민연대 어머니들, 장애아동부모회 어머니들 등 많은 이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