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21/물이되는꿈2007. 9. 1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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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7일 아프간 사태에 대한 아프간 철군 촛불집회(출처 : 한국사회당)

 
 
공격적인 선교활동 책임론으로 정부 파병정책에 면죄부 줄 순 없다
헌법에 평화유지 목적 분명히하고 국민 합의와 민주적 절차 따라야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통해 탈냉전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새롭게 재편된 국제사회 질서 속에서 국가의 역할에 따른 책임이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 경험했다. 이제 우리는 이번 사태를 부른 원인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행위 책임론과 함께 피랍자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정부의 자제 요청에도 위험지역에서 무리하게 활동했다가 납치돼 온국민에게 불안과 우려를 준 만큼 본인들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충분한 배려 없이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선교행위는 문제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선교활동을 중단하기로 한 합의에 불만을 품고 선교활동을 계속하겠다는 일부 개신교 단체들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활동 책임론이 정부의 파병정책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한국은 2001년부터 지금까지 다섯 차례나 기간을 연장하며 아프가니스탄 파병 정책을 유지해 왔는데, 이 역시 이번 사태를 불러 온 주요한 원인임이 분명하다. 탈레반도 한국이 군인을 파병해 미국 주도 연합군의 적대행위를 강화하도록 도왔다며 한국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정부는 이번 사태가 파병 때문에 발생한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동의·다산 부대의 파병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피랍자 석방 분위기가 조성됐다며 일부 개신교 단체와 똑같이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부의 파병정책이 계속되는 한 이런 비극은 또다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의 막무가내 파병정책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선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우리 헌법의 평화주의 요소(제5조 1항)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헌법 제60조 “국군의 외국에의 파병”을 “평화유지 목적을 위한 국군 파병”으로 개정해 파병의 목적을 평화유지 활동으로 분명히하고, 이를 지키는 헌법적 실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아울러 파병규제법을 제정해야 한다. 파병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 문제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분쟁 당사국 혹은 당사자들이 있는 국제사회의 민감한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므로 그 절차가 충분한 국민적 합의와 민주적 과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파병규제법을 통해 파병이 국제평화 유지에 이바지하는 목적 정당성을 갖는 것을 전제로 엄격한 기준과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규제되도록 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국회의 동의권이 형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조항도 마련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끔찍한 충격과 그 충격의 끝자락에서 일부 개신교 단체와 정부가 보여준 무책임한 태도에 국민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부디 책임 있는 논의와 반성으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 줄 것을 정부와 일부 개신교 단체에 촉구한다.

조영권/한국사회당 상임기획위원

<이 글은 9월 11일 자 한겨레 왜나면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2351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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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1/물이되는꿈2007. 8. 21. 19:42

1996년 카불을 장악한 탈레반은 마자르와 바미얀까지 함락시킴으로써 북쪽의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탈레반 율법은 더욱 강화되었다. 물건을 훔친 자들의 손발을 자르거나 간음한 자들을 돌로 쳐 죽이는 공개 처형은 카불과 칸다하르에서 주례행사가 되었다. 모든 남자는 길게 수염을 길러야 했고 여성의 바깥출입은 봉쇄되었다.

이에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각종 결의문을 통해 탈레반을 비난하고 나섰다. 1996년 10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문을 통해 국제인권법의 규약을 엄격히 고수하라고 촉구했다. 유럽의회도 탈레반 정부에 반대할 것을 모든 국가에게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런데  탈레반은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서양의 비난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이라기보다 서양의 자유주의 이념에 기초한 공격으로 이해했다. 국제사회는 탈레반이 국민들에게 부과한 특정 신조와 전체주의 체제 강요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데 반해, 탈레반은 정당한 도덕  규범을 강제함으로써 사회를 개선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탈레반은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사회의 조약들이 절대적으로 서양의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와중에 케냐와 탄자니아 미국대사관이 폭파되어 224명이 죽고 4,500여 명이 부상당하는 테러가 발생했다.(1998년 8월) 미국은 어떠한 결정적 증거도 없이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가 이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보고, 아프가니스탄 낭가르하르주(州) 잘랄라바드 근방의 알 카에다 훈련기지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마침 이때는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이 백악관을 강타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탈레반 정부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만약 미국이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기만 한다면 오사마 빈 라덴을 이슬람의 중립국으로 인도하거나 아프가니스탄의 현재 사법 절차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1999년 10월 탈레반이 가진 해외 은행 자산을 동결하고 아리아나아프간항공 전 노선을 봉쇄하는 등 제재를 가하도록 했다. 또한 탈레반 반대 세력에 대한 무기 공급은 허가하면서 탈레반 정부에는 허가하지 않는 일방적인 무기 금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아침, 민간항공기 3대가 납치범들의 조종에 따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국방성 건물에 충돌했다. 미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테러 공격에 격분한 미국은 즉시 오사마 빈 라덴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지목하고 그가 은신해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10월 7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가공할 첨단무기로 무장한 미국은 11월 13일 카불을 장악했으며, 12월 22일 하미드 카이자르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미국의 침략전쟁이 남긴 아프가니스탄의 모습>

- 7년 동안의 사망자 수를 집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 2007년 상반기에만 1천 명 민간인 사망(유엔 발간 아프가니스탄 보고서)
- 2006년 한 해동안 미군이 주도한 군사작전으로 사망한 사람이 4,400여 명에 달하고 216만 여명의 난민 발생(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 유아 사망률이 1천 명당 152명으로 세계 1위
- 평균 수명 역시 42세로 세계 2위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피랍자들에게 무사귀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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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5월 라디오 방송 ‘샤리아에 대한 탈레반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세상에는 서양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인권의 진정한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국가가 수십 아니 수백 개가 있다. 사형, 구속, 인권 침해 등 많은 사건들이 이 국가들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국가들에 대한 진지한 반대가 없었음은 물론이고, 소위 인권을 지원하는 국가들이 이런 국가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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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1/물이되는꿈2007. 8. 13. 15:03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

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2. 근대국가의 수립과 공산정권의 등장
3. 소련의 침공과 지하드, 그리고 아프간 내전
4. 탈레반의 등장과 집권
5. 벼랑 끝에 선 탈레반,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전쟁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는 탈냉전 이후 줄곧 서방의 새로운 공적(公敵)이 되어왔다.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자, 미국은 어떠한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오사마 빈 라덴이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국제 사회에 보도했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한 마디로 그들이 테러리스트이고 억압자라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이미지를 조장해 왔다. 그런데 우리는 탈레반에 대해 이런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물론 여성인권 등 그들이 스스로 이러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봄이다. 당시 탈레반의 지도자였던 물라 오마르는 칸다하르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신게사르 마을에서 작은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군에 저항하는 무자헤딘으로 게릴라전에 참전하여 네 번이나 부상을 당했으며, 이 때문에 오른쪽 눈이 멀었다. 이 무렵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 무자헤딘은 분열되어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칸다하르 일대를 지배한 무자헤딘 군벌들의 횡포는 극에 달해 있었다.


탈레반의 등장과 관련해 전해지는 사건이 있다. 무자헤딘 지휘관이 신게사르 마을에서 두 명의 소녀를 납치해 강제로 머리를 깎고 겁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오마르가 30여 명의 마드라사 학생들을 이끌고 무자헤딘을 공격해 소녀들을 구출하고 무자헤딘 지휘관을 탱크의 포신에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이러한 일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전설이 되어 오마르가 이끄는 무리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이들은 문자 그대로 ‘(마드라사의)학생’이라는 의미의 ‘탈레반’이라 불리게 된다. 탈레반 혹은 탈리반(taliban)은 ‘탈립(talib)’의 복수형으로, ‘탈립’은 원래 ‘구도자(seeker)'라는 뜻이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을 올바로 세우는 것을 기치로 내세웠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많은 마드라사 학생들이 오마르의 무리에 가담했다. 파키스탄에서 온 마드라사 학생들은 대부분 아프간 난민들이었으나, 이슬람원리주의의 이상에 따라 새로운 지하드에 동참하려는 파키스탄 젊은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탈레반 운동은 이슬람이 단순히 개인적 신앙을 위한 토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18세기의 초기 이슬람 운동의 전통과 유사하다. 그들에게 국가란 이슬람의 가치가 집단적으로 체현된 것이며, 국가의 지속은 시민들의 이러한 이슬람의 가치들을 지지하고 지켜내는 데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초기 이슬람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이슬람 운동은 19세기부터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려 했던 영국의 시도와 러시아로부터의 압력과 간섭에 저항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성격을 더욱더 순수한 이슬람에 근접하도록 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왔다.


탈레반의 성장에는 파키스탄의 은밀한 지원이 있었다. 파키스탄의 거상(巨商)들은 퀘타에서 칸다하르와 헤라트를 거쳐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인 아슈하바드까지, 파키스탄과 북쪽의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로를 뚫는데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교역로가 통과하는 아프가니스탄 남부, 특히 칸다하르 일대의 치안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조건이었다.


이러한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고 탈레반은 칸다하르를 함락하게 된다. 칸다하르를 함락함으로써 아제 탈레반은 소련군이 남기고 간 헬리콥터와 미그기까지 갖춘 무시하지 못할 무장 세력으로 성장했다. 탈레반은 현존하는 썩은 권력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구원하고 그 위에 이슬람과 일치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칸다하르에 질서를 세우는데 뛰어난 성과를 거움으로써 상당한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탈레반은 여기서 기세를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헤라트를 향해, 북쪽으로 카불을 향해 파죽지세로 올라갔다. 그리고 1996년 9월, 수도 카불로 무혈 입성하였다.


탈레반은 그야말로 신의 가호를 받는 불패의 전사인 듯했다. 탈레반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을 바로 세우겠다는 이상에 불타고 도덕적 우월감으로 가득 찬 지도자와 어린 전사들이 그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탈레반의 군사적 성공은 결코 우연이나 신의 가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정되고 이를 통해 중앙아시아까지 교역로를 열고자 했던 파키스탄의 정보국은 조직적으로 탈레반의 주축을 훈련시켜 침투시키고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마침 칸다하르 일대의 아프가니스탄 남부 주민들은 공산정권이나 소련군에 못지않게 고통을 안겨준 부패하고 타락한 무자헤딘 군벌들에게 몇 년째 시달리던 터라 탈레반의 등장을 환영했다.


미국 역시 탈레반의 성장에 기여했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을 때, 대사관 직원들이 1년 동안 인질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 바 있는 미국에게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와 수니파가 다수인 탈레반이 적대관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탈레반을 지원할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석유에 있었다. 미국의 석유회사인 UNOCAL(유노컬)은 아프가니스탄을 관통하여 구(舊)소련 령 중앙아시아의 유전에서 파키스탄과 아라비아 해까지 송유관을 놓으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파키스탄과 다른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안정이 확보되는 것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탈레반의 등장을 반기게 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건설되었거나, 추진충인 석유와 가스 수송관들, 사진출처 : 경계를 넘어 http://www.ifi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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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레반 운동의 목표는『알-마잘라』의 1996년 10월 23일자 기사인 탈레반 대변인 물라 와킬 아흐메드와의 인터뷰에 잘 요약되어 있다. 탈레반 운동이 어떻게, 왜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무자헤딘 당들이 1992년 권력을 잡은 이후 아프가니스탄 인민들은 나라에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카불에서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특히 칸다하르에서 일부 지역 지도자들은 무장범죄단을 형성하여 서로 싸우기 바빴다. 부패와 절도가 횡행했고 도처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여성들은 공격받고, 강간당하고, 죽어 나갔다. 그래서 이러한 일이 자행된 후에 한 종교 학교의 학생 단체 하나가 칸다하르 주의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이 지도자들에 맞서 봉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우리는 칸다하르에 당도하기 전에 몇몇 주요 지역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이전의 지도자들은 결국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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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1/물이되는꿈2007. 8. 10. 17:28

<아래 글은 2007년 8월 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태현 교수의 '미국 책임론의 위험성'이란 기고문에 대한 반론이다.>


김태현 교수는 아프간 피랍 사태에 대한 미국 책임론에 대해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파탄과 사태 해결 책임을 남에게 넘기고 안주하려는 도덕적 파탄의 소산이라며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면에서 김태현 교수 주장의 출발은 옳다. 하지만 사태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책임의 주체에 대한 판단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김태현 교수는 사태의 본질을 ‘납치->석방->또 납치’라는 복잡한 순환구조에서 찾는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미국 정부를 움직여 인질-수감자 교환을 이끌어낸다면, 테러범들은 한국인들을 ‘유용한’ 인질로 인식해 너도 나도 한국인 ‘사냥’에 나서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김태현 교수는 확답을 줄 수 있는가? 탈레반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을 때 다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줄 수 있는가 말이다. 김태현 교수야 말로 사태의 본질을 현상에 귀일시키는 단선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납치->석방->또 납치’라는 순환구조의 맨 앞에는 미국의 점령과 한국의 파병이 있다. 그래서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점령과 파병이 먼저 중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또 다시 이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희생될 수밖에 없다. 앞선 김선일 씨의 죽음과 윤장호 씨의 죽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물론 김태현 교수는 이에 대해 책임의 소재를 돌림으로써 심리적 위안을 줄지 몰라도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심리적 위안을 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프간의 내전과 테러는 지난 2001년 미국의 점령 이후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성찰 없이, 어떻게 한국인 피랍 사태만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사태의 본질을 이렇게 이해했을 때, 그 책임의 주체는 한결 분명해진다. 미국에게 점령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게다가 탈레반의 요구사항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이 아닌가? 김태현 교수의 말처럼 무고한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에도 책임이 있다. 정부는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의 목적을 인도적 차원의 구호 및 진료 그리고 재건이라 밝혀왔다. 하지만 다산·동의부대의 파병연장안에는 그 목적이 “미군 및 동맹군의 기지 운용지원”, “미군 및 동맹군에 대한 진료활동”이라고 분명히 서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파견부대의 작전 운용에 관한 통제권한 역시 현지 사령관, 즉 미군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결국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는 정부가 밝힌 인도적 차원의 구호와 진료 그리고 재건과는 거리가 먼, 미국이 주도한 침공과 점령의 동조부대임이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파병이 없었더라면 이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단 말인가?”라며 파병원인론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번 사태에 대한 현상적인 측면만을 근거한 주장이다. 탈레반이 자행하고 있는 테러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한국 정부의 파병의 목적과 성격을 따져본다면, 이번 사태는 결코 한국의 파병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피랍 직후 탈레반이 한국군 철군이라는 요구조건을 내 걸었던 점을 상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미국의 책임과 적극적 역할을 주장하는 것은 탈레반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탈레반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테러는 올바른 저항 수단이 될 수 없다. 탈레반은 지금이라도 즉시 한국인 인질을 석방해야 한다.


아프간 피랍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다. 피랍자들의 안전과 무사귀환을 다시 한 번 염원한다.


〈조영권 / 한국사회당 부대변인〉


아래 글은 김태현 교수의 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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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미국 책임론의 위험성
입력: 2007년 08월 08일 17:59:48
 
 
 
힘없고 무고한 사람을 인질로 잡고 돈, 기타 보상을 요구하는 납치는 지극히 비열한 범죄다. 그리고 비열한 만큼이나 해결이 어렵다. 무고한 인질을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 첫째다. 그처럼 비열한 행위를 처벌하여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둘째다. 그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셋째다. 급하기로는 첫째가 가장 급하고 중하기로는 셋째가 가장 중하다. 둘째와 셋째는 동전의 양면이다.
문제는 첫째와 셋째가 서로 충돌한다는 데 있다. 범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인질을 구출하면 범인은 같은 범죄를 거듭하고 모방범죄까지 조장할 우려가 있다. 게다가 요구를 들어준다고 무사히 구출한다는 보장도 없다. 비열한 범인에게 신뢰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인질을 살해함으로써 완전범죄를 꾀할 수도 있다. 이 어려움이 멜깁슨이 주연한 영화 “랜섬”에 극적으로 표현돼 있다.


아프간의 탈레반 세력이 우리 국민 23명을 인질로 잡아 그중 2명을 살해하고 나머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 인질 문제 해결의 어려움을 반영하듯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고 가족과 국민들의 안타까움도 극에 달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일부 정치인들이 미국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그들의 주장은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파탄과 사태 해결 책임을 남에게 넘기고 안주하려는 도덕적 파탄의 소산이다.


미국 책임론은 대체로 세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는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와 협상할 수 없다는 ‘교조적’ 태도를 고집함으로써 협상을 통한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미국, 특히 부시 행정부가 ‘침략’ 전쟁을 자행하고 한국의 참전을 ‘강요’하여 테러리스트에게 명분을 주고 한국인들이 대상이 되게 했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미국의 힘이 너무 강하여 테러리즘과 같은 비대칭적 폭력이 양산되고 미국 정책의 오만이 그것을 더욱 조장한다는 주장이다.


셋째 주장은 지나친 일반론이어서 이 일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도 책임의 소재를 돌림으로써 심리적 위안을 줄지 몰라도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 주로 첫째가 비난의 대상인데, 그것이 지적으로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도덕적으로 이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극히 위험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탈레반이 나름대로 ‘정당한’ 목표를 추구한다면 수단으로서 테러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도덕관을 가진다. 탈레반과 상해 임시정부를 비교한 해괴망측한 발상도 그래서 나왔다. 임정이 존경을 받는 것은 독립추구라는 목적의 정당성 때문만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폭력에 호소하더라도 결코 무고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수단의 도덕성 때문이다.


지적으로 이들은 문제의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미국에 귀일시키는 단선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설사 우리의 외교적 노력으로 미국이 아프간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인질-수감자 교환을 이끌어낸다고 치자. 그것이 한국 외교의 개가일까? 미국을 무시하고 독자적 외교를 펼치는 프랑스는 아프간 정부를 압박하여 인질-수감자 교환에 성공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이 유별나게 자주 인질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성공’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그들 목적을 위해 ‘유용한’ 인질이라고 알려지면 테러범들은 너도 나도 한국인 ‘사냥’에 나설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뛰어야 살아 남고 성장하는 한국이다. 해외의 한국인들이 인질범들의 ‘사냥감’이 되고, 그로 인해 한국인들의 대외 활동이 위축된다면, 그리하여 나라의 생존과 발전이 타격을 받는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납치범에게 인질을 잡고 있어봤자 얻는 게 없고 잃는 것만 커진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납득시키는 것이 사태해결의 핵심이다. 단 그들에게 체면이 있다면 그것을 살려주는 것도 외교적 지혜다. 과거 서희 장군의 외교가 그랬던 것처럼.


〈김태현 /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Posted by alternative
2010.6.21/물이되는꿈2007. 8. 9. 16:40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


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2. 근대국가의 수립과 공산정권의 등장
3. 소련의 침공과 지하드, 그리고 아프간 내전
4. 탈레반의 등장과 집권
5. 벼랑 끝에 선 탈레반,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전쟁



이슬람주의자들의 출발점은 이슬람의 일상경험, 즉 하나의 문화적 형태로 해석된 이슬람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통찰력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귀의는 종교적 신앙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정치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울레마는 사회 내의 관계의 토대 위에 있는 정치를 법에 의해 수립된 것으로 정의했다. 국가는 무슬림 사회 내에서 정의가 작동되게 하는 수단이다. 정치사상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무슬림 혹은 무슬림 공동체이다. 정치는 법이 확장된 것이다.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사회의 본질은 국가의 본질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Roy, 1986: 80)



공산정부는 토지 재분배와 고리대금의 폐지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아프가니스탄의 전통적인 사회관습과 생활현실을 도외시한 채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도시 카불에서는 도시 엘리트와 지식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숙청과 투옥이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민심이 이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산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무기를 들고 공산정권에 저항하는 지하드(Jihād, 聖戰)*에 동참하여 무자헤딘이 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소요와 봉기기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이제 갓 들어선 공산정권은 위기를 맞게 된다.


소련으로서는 이러한 사태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소련은 결국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로 결정하고 1979년 12월 카불 내 주요 거점을 장악하고 다룰라만 궁을 공격했다.


소련은 카르말을 대통령으로 앉히고 유화정책을 폈다. 동시에 소련을 모델로 한 아프가니스탄의 소비에트화를 꾀했다. 하지만 무자헤딘의 저항은 갈수록 거세졌다.


아프가니스탄에 별 관심이 없었던 미국은 소련이 침공하자 갑자기 이 나라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페르시아 만의 산유지가 돌연 소련의 공격권 안에 훨씬 가까이 들어오게 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대통령 카터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평화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로써 미국은 공산정권 및 소련군과 무자헤딘간의 전투가 격화되고 장기화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무자헤딘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미국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이슬람국, 또 소련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중국이 무자헤딘의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소련은 처음에 불과 서너 달이면 아프가니스탄 내의 소요와 무장봉기를 진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소련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전을 편 무자헤딘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고 해가 흐를수록 무자헤딘의 저항은 점점 거세졌다.


1984년 브레즈네프가 죽고 이듬해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 소련은 몇 년 동안 큰 짐이 되어온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고 1988년 4월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었다. 소련은 그 해 5월 철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2월 마지막 부대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소련군이 물러나면 나지불라 정권이 곧 무너질 것으로 보였으나, 나지볼라는 이때부터 몇 년간 카불을 지키며 건재했다. 소련이 아프간 정부군에게 많은 무기를 넘겨주고 군사지원을 계속했기 때문이며, 무자헤딘 여러 정파가 단합하기보다 서로 주도권 싸움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2년 1월 러시아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하기로 합의하고 파키스탄도 이에 따르자, 대세는 현격하게 무자헤딘 쪽으로 기울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4월 28일 무자헤딘 지도자들로 구성된 ‘이슬람 지하드 위원회’가 카불에 입성하여 아프가니스탄이슬람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카불을 둘러싼 무자헤딘 여러 파간의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다. 그 와중에 1995년, 탈레반이라는 신비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며 결국 탈레반은 1996년 카불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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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여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다. 그런데 지하드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프가니스탄이 세속 세력에 의해 훼손되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이슬람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어 상당수 주민들이 이웃 이슬람 국가들로 탈주하는 상황에서 정당화된다. 서기 622년 무함마드가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해진 박해에 맞서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피한 사실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 권리에 대한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전례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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