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21/물이되는꿈2007. 8. 13. 15:03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

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2. 근대국가의 수립과 공산정권의 등장
3. 소련의 침공과 지하드, 그리고 아프간 내전
4. 탈레반의 등장과 집권
5. 벼랑 끝에 선 탈레반,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전쟁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는 탈냉전 이후 줄곧 서방의 새로운 공적(公敵)이 되어왔다.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자, 미국은 어떠한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오사마 빈 라덴이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국제 사회에 보도했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한 마디로 그들이 테러리스트이고 억압자라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이미지를 조장해 왔다. 그런데 우리는 탈레반에 대해 이런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물론 여성인권 등 그들이 스스로 이러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봄이다. 당시 탈레반의 지도자였던 물라 오마르는 칸다하르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신게사르 마을에서 작은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군에 저항하는 무자헤딘으로 게릴라전에 참전하여 네 번이나 부상을 당했으며, 이 때문에 오른쪽 눈이 멀었다. 이 무렵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 무자헤딘은 분열되어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칸다하르 일대를 지배한 무자헤딘 군벌들의 횡포는 극에 달해 있었다.


탈레반의 등장과 관련해 전해지는 사건이 있다. 무자헤딘 지휘관이 신게사르 마을에서 두 명의 소녀를 납치해 강제로 머리를 깎고 겁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오마르가 30여 명의 마드라사 학생들을 이끌고 무자헤딘을 공격해 소녀들을 구출하고 무자헤딘 지휘관을 탱크의 포신에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이러한 일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전설이 되어 오마르가 이끄는 무리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이들은 문자 그대로 ‘(마드라사의)학생’이라는 의미의 ‘탈레반’이라 불리게 된다. 탈레반 혹은 탈리반(taliban)은 ‘탈립(talib)’의 복수형으로, ‘탈립’은 원래 ‘구도자(seeker)'라는 뜻이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을 올바로 세우는 것을 기치로 내세웠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많은 마드라사 학생들이 오마르의 무리에 가담했다. 파키스탄에서 온 마드라사 학생들은 대부분 아프간 난민들이었으나, 이슬람원리주의의 이상에 따라 새로운 지하드에 동참하려는 파키스탄 젊은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탈레반 운동은 이슬람이 단순히 개인적 신앙을 위한 토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18세기의 초기 이슬람 운동의 전통과 유사하다. 그들에게 국가란 이슬람의 가치가 집단적으로 체현된 것이며, 국가의 지속은 시민들의 이러한 이슬람의 가치들을 지지하고 지켜내는 데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초기 이슬람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이슬람 운동은 19세기부터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려 했던 영국의 시도와 러시아로부터의 압력과 간섭에 저항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성격을 더욱더 순수한 이슬람에 근접하도록 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왔다.


탈레반의 성장에는 파키스탄의 은밀한 지원이 있었다. 파키스탄의 거상(巨商)들은 퀘타에서 칸다하르와 헤라트를 거쳐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인 아슈하바드까지, 파키스탄과 북쪽의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로를 뚫는데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교역로가 통과하는 아프가니스탄 남부, 특히 칸다하르 일대의 치안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조건이었다.


이러한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고 탈레반은 칸다하르를 함락하게 된다. 칸다하르를 함락함으로써 아제 탈레반은 소련군이 남기고 간 헬리콥터와 미그기까지 갖춘 무시하지 못할 무장 세력으로 성장했다. 탈레반은 현존하는 썩은 권력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구원하고 그 위에 이슬람과 일치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칸다하르에 질서를 세우는데 뛰어난 성과를 거움으로써 상당한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탈레반은 여기서 기세를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헤라트를 향해, 북쪽으로 카불을 향해 파죽지세로 올라갔다. 그리고 1996년 9월, 수도 카불로 무혈 입성하였다.


탈레반은 그야말로 신의 가호를 받는 불패의 전사인 듯했다. 탈레반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을 바로 세우겠다는 이상에 불타고 도덕적 우월감으로 가득 찬 지도자와 어린 전사들이 그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탈레반의 군사적 성공은 결코 우연이나 신의 가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정되고 이를 통해 중앙아시아까지 교역로를 열고자 했던 파키스탄의 정보국은 조직적으로 탈레반의 주축을 훈련시켜 침투시키고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마침 칸다하르 일대의 아프가니스탄 남부 주민들은 공산정권이나 소련군에 못지않게 고통을 안겨준 부패하고 타락한 무자헤딘 군벌들에게 몇 년째 시달리던 터라 탈레반의 등장을 환영했다.


미국 역시 탈레반의 성장에 기여했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을 때, 대사관 직원들이 1년 동안 인질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 바 있는 미국에게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와 수니파가 다수인 탈레반이 적대관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탈레반을 지원할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석유에 있었다. 미국의 석유회사인 UNOCAL(유노컬)은 아프가니스탄을 관통하여 구(舊)소련 령 중앙아시아의 유전에서 파키스탄과 아라비아 해까지 송유관을 놓으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파키스탄과 다른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안정이 확보되는 것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탈레반의 등장을 반기게 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건설되었거나, 추진충인 석유와 가스 수송관들, 사진출처 : 경계를 넘어 http://www.ifi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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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레반 운동의 목표는『알-마잘라』의 1996년 10월 23일자 기사인 탈레반 대변인 물라 와킬 아흐메드와의 인터뷰에 잘 요약되어 있다. 탈레반 운동이 어떻게, 왜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무자헤딘 당들이 1992년 권력을 잡은 이후 아프가니스탄 인민들은 나라에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카불에서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특히 칸다하르에서 일부 지역 지도자들은 무장범죄단을 형성하여 서로 싸우기 바빴다. 부패와 절도가 횡행했고 도처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여성들은 공격받고, 강간당하고, 죽어 나갔다. 그래서 이러한 일이 자행된 후에 한 종교 학교의 학생 단체 하나가 칸다하르 주의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이 지도자들에 맞서 봉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우리는 칸다하르에 당도하기 전에 몇몇 주요 지역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이전의 지도자들은 결국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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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1/물이되는꿈2007. 8. 10. 17:28

<아래 글은 2007년 8월 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태현 교수의 '미국 책임론의 위험성'이란 기고문에 대한 반론이다.>


김태현 교수는 아프간 피랍 사태에 대한 미국 책임론에 대해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파탄과 사태 해결 책임을 남에게 넘기고 안주하려는 도덕적 파탄의 소산이라며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면에서 김태현 교수 주장의 출발은 옳다. 하지만 사태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책임의 주체에 대한 판단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김태현 교수는 사태의 본질을 ‘납치->석방->또 납치’라는 복잡한 순환구조에서 찾는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미국 정부를 움직여 인질-수감자 교환을 이끌어낸다면, 테러범들은 한국인들을 ‘유용한’ 인질로 인식해 너도 나도 한국인 ‘사냥’에 나서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김태현 교수는 확답을 줄 수 있는가? 탈레반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을 때 다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줄 수 있는가 말이다. 김태현 교수야 말로 사태의 본질을 현상에 귀일시키는 단선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납치->석방->또 납치’라는 순환구조의 맨 앞에는 미국의 점령과 한국의 파병이 있다. 그래서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점령과 파병이 먼저 중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또 다시 이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희생될 수밖에 없다. 앞선 김선일 씨의 죽음과 윤장호 씨의 죽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물론 김태현 교수는 이에 대해 책임의 소재를 돌림으로써 심리적 위안을 줄지 몰라도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심리적 위안을 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프간의 내전과 테러는 지난 2001년 미국의 점령 이후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성찰 없이, 어떻게 한국인 피랍 사태만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사태의 본질을 이렇게 이해했을 때, 그 책임의 주체는 한결 분명해진다. 미국에게 점령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게다가 탈레반의 요구사항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이 아닌가? 김태현 교수의 말처럼 무고한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에도 책임이 있다. 정부는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의 목적을 인도적 차원의 구호 및 진료 그리고 재건이라 밝혀왔다. 하지만 다산·동의부대의 파병연장안에는 그 목적이 “미군 및 동맹군의 기지 운용지원”, “미군 및 동맹군에 대한 진료활동”이라고 분명히 서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파견부대의 작전 운용에 관한 통제권한 역시 현지 사령관, 즉 미군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결국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는 정부가 밝힌 인도적 차원의 구호와 진료 그리고 재건과는 거리가 먼, 미국이 주도한 침공과 점령의 동조부대임이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파병이 없었더라면 이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단 말인가?”라며 파병원인론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번 사태에 대한 현상적인 측면만을 근거한 주장이다. 탈레반이 자행하고 있는 테러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한국 정부의 파병의 목적과 성격을 따져본다면, 이번 사태는 결코 한국의 파병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피랍 직후 탈레반이 한국군 철군이라는 요구조건을 내 걸었던 점을 상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미국의 책임과 적극적 역할을 주장하는 것은 탈레반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탈레반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테러는 올바른 저항 수단이 될 수 없다. 탈레반은 지금이라도 즉시 한국인 인질을 석방해야 한다.


아프간 피랍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다. 피랍자들의 안전과 무사귀환을 다시 한 번 염원한다.


〈조영권 / 한국사회당 부대변인〉


아래 글은 김태현 교수의 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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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미국 책임론의 위험성
입력: 2007년 08월 08일 17:59:48
 
 
 
힘없고 무고한 사람을 인질로 잡고 돈, 기타 보상을 요구하는 납치는 지극히 비열한 범죄다. 그리고 비열한 만큼이나 해결이 어렵다. 무고한 인질을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 첫째다. 그처럼 비열한 행위를 처벌하여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둘째다. 그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셋째다. 급하기로는 첫째가 가장 급하고 중하기로는 셋째가 가장 중하다. 둘째와 셋째는 동전의 양면이다.
문제는 첫째와 셋째가 서로 충돌한다는 데 있다. 범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인질을 구출하면 범인은 같은 범죄를 거듭하고 모방범죄까지 조장할 우려가 있다. 게다가 요구를 들어준다고 무사히 구출한다는 보장도 없다. 비열한 범인에게 신뢰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인질을 살해함으로써 완전범죄를 꾀할 수도 있다. 이 어려움이 멜깁슨이 주연한 영화 “랜섬”에 극적으로 표현돼 있다.


아프간의 탈레반 세력이 우리 국민 23명을 인질로 잡아 그중 2명을 살해하고 나머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 인질 문제 해결의 어려움을 반영하듯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고 가족과 국민들의 안타까움도 극에 달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일부 정치인들이 미국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그들의 주장은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파탄과 사태 해결 책임을 남에게 넘기고 안주하려는 도덕적 파탄의 소산이다.


미국 책임론은 대체로 세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는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와 협상할 수 없다는 ‘교조적’ 태도를 고집함으로써 협상을 통한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미국, 특히 부시 행정부가 ‘침략’ 전쟁을 자행하고 한국의 참전을 ‘강요’하여 테러리스트에게 명분을 주고 한국인들이 대상이 되게 했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미국의 힘이 너무 강하여 테러리즘과 같은 비대칭적 폭력이 양산되고 미국 정책의 오만이 그것을 더욱 조장한다는 주장이다.


셋째 주장은 지나친 일반론이어서 이 일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도 책임의 소재를 돌림으로써 심리적 위안을 줄지 몰라도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 주로 첫째가 비난의 대상인데, 그것이 지적으로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도덕적으로 이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극히 위험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탈레반이 나름대로 ‘정당한’ 목표를 추구한다면 수단으로서 테러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도덕관을 가진다. 탈레반과 상해 임시정부를 비교한 해괴망측한 발상도 그래서 나왔다. 임정이 존경을 받는 것은 독립추구라는 목적의 정당성 때문만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폭력에 호소하더라도 결코 무고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수단의 도덕성 때문이다.


지적으로 이들은 문제의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미국에 귀일시키는 단선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설사 우리의 외교적 노력으로 미국이 아프간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인질-수감자 교환을 이끌어낸다고 치자. 그것이 한국 외교의 개가일까? 미국을 무시하고 독자적 외교를 펼치는 프랑스는 아프간 정부를 압박하여 인질-수감자 교환에 성공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이 유별나게 자주 인질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성공’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그들 목적을 위해 ‘유용한’ 인질이라고 알려지면 테러범들은 너도 나도 한국인 ‘사냥’에 나설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뛰어야 살아 남고 성장하는 한국이다. 해외의 한국인들이 인질범들의 ‘사냥감’이 되고, 그로 인해 한국인들의 대외 활동이 위축된다면, 그리하여 나라의 생존과 발전이 타격을 받는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납치범에게 인질을 잡고 있어봤자 얻는 게 없고 잃는 것만 커진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납득시키는 것이 사태해결의 핵심이다. 단 그들에게 체면이 있다면 그것을 살려주는 것도 외교적 지혜다. 과거 서희 장군의 외교가 그랬던 것처럼.


〈김태현 /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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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1/물이되는꿈2007. 8. 9. 16:40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


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2. 근대국가의 수립과 공산정권의 등장
3. 소련의 침공과 지하드, 그리고 아프간 내전
4. 탈레반의 등장과 집권
5. 벼랑 끝에 선 탈레반,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전쟁



이슬람주의자들의 출발점은 이슬람의 일상경험, 즉 하나의 문화적 형태로 해석된 이슬람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통찰력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귀의는 종교적 신앙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정치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울레마는 사회 내의 관계의 토대 위에 있는 정치를 법에 의해 수립된 것으로 정의했다. 국가는 무슬림 사회 내에서 정의가 작동되게 하는 수단이다. 정치사상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무슬림 혹은 무슬림 공동체이다. 정치는 법이 확장된 것이다.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사회의 본질은 국가의 본질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Roy, 1986: 80)



공산정부는 토지 재분배와 고리대금의 폐지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아프가니스탄의 전통적인 사회관습과 생활현실을 도외시한 채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도시 카불에서는 도시 엘리트와 지식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숙청과 투옥이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민심이 이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산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무기를 들고 공산정권에 저항하는 지하드(Jihād, 聖戰)*에 동참하여 무자헤딘이 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소요와 봉기기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이제 갓 들어선 공산정권은 위기를 맞게 된다.


소련으로서는 이러한 사태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소련은 결국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로 결정하고 1979년 12월 카불 내 주요 거점을 장악하고 다룰라만 궁을 공격했다.


소련은 카르말을 대통령으로 앉히고 유화정책을 폈다. 동시에 소련을 모델로 한 아프가니스탄의 소비에트화를 꾀했다. 하지만 무자헤딘의 저항은 갈수록 거세졌다.


아프가니스탄에 별 관심이 없었던 미국은 소련이 침공하자 갑자기 이 나라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페르시아 만의 산유지가 돌연 소련의 공격권 안에 훨씬 가까이 들어오게 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대통령 카터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평화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로써 미국은 공산정권 및 소련군과 무자헤딘간의 전투가 격화되고 장기화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무자헤딘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미국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이슬람국, 또 소련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중국이 무자헤딘의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소련은 처음에 불과 서너 달이면 아프가니스탄 내의 소요와 무장봉기를 진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소련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전을 편 무자헤딘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고 해가 흐를수록 무자헤딘의 저항은 점점 거세졌다.


1984년 브레즈네프가 죽고 이듬해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 소련은 몇 년 동안 큰 짐이 되어온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고 1988년 4월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었다. 소련은 그 해 5월 철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2월 마지막 부대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소련군이 물러나면 나지불라 정권이 곧 무너질 것으로 보였으나, 나지볼라는 이때부터 몇 년간 카불을 지키며 건재했다. 소련이 아프간 정부군에게 많은 무기를 넘겨주고 군사지원을 계속했기 때문이며, 무자헤딘 여러 정파가 단합하기보다 서로 주도권 싸움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2년 1월 러시아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하기로 합의하고 파키스탄도 이에 따르자, 대세는 현격하게 무자헤딘 쪽으로 기울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4월 28일 무자헤딘 지도자들로 구성된 ‘이슬람 지하드 위원회’가 카불에 입성하여 아프가니스탄이슬람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카불을 둘러싼 무자헤딘 여러 파간의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다. 그 와중에 1995년, 탈레반이라는 신비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며 결국 탈레반은 1996년 카불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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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여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다. 그런데 지하드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프가니스탄이 세속 세력에 의해 훼손되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이슬람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어 상당수 주민들이 이웃 이슬람 국가들로 탈주하는 상황에서 정당화된다. 서기 622년 무함마드가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해진 박해에 맞서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피한 사실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 권리에 대한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전례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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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1/물이되는꿈2007. 8. 8. 12:59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


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2. 근대국가의 수립과 공산정권의 등장
3. 소련의 침공과 지하드, 아프간 내전
4. 탈레반의 등장과 집권
5. 벼랑 끝에 선 탈레반,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전쟁



19세기 초 아프가니스탄은 왕권을 둘러싼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사이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열강들의 각축은 더욱 고조된다.


영국은 인도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이 다른 열강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경계했다. 특히 프랑스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로 넘어올 것을 두려워했다. 19세기 초부터 강력하게 남진정책을 펼치고 있었던 러시아는 1828년 투르크만치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란으로부터 아르메니아를 빼앗고 사실상 이란을 손에 넣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에게 아프가니스탄의 전략적 중요성은 커지게 된다. 결국 영국은 1838년과 1879년, 1919년 총 3차례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게 된다.


3차 침공 직전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 두 가지 현안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19세기 말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를 나눈 ‘두란드 라인(Durand Line)’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인도 식민지정부가 획정한 이 국경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이버르, 페샤와르, 스와트 등 주요 파슈튼족의 거주지가 영국령 인도로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국령 인도의 파슈툰 거주 지역에서는 소요가 끊이지 않았으며 20세기 말까지 이 문제는 계속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3차례의 전쟁 끝에 양국은 영국-아프가니스탄 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도 두란드 라인을 통해 갈라진 영국령 인도 내에 있는 파슈툰 부족에 대한 관할권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그 결과 이 문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 분할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결국 파키스탄은 파슈툰 지역을 포함한 채 독립하게 된다.

 

파키스탄의 등장은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주변 세력의 역학관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과 파슈툰족 거주문제로 여러 차례 갈등을 빚어 때로는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내륙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에게 교역로의 차단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가져왔다. 결국 1961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곤경에 처한 아프가니스탄에게 소련은 어느 나라보다 좋은 우방이었다. 소련은 관대하게 물자를 공급하고 저렴한 이자로 차관을 제공했다. 군사적으로도 다량의 소련제 무기를 지원하고 많은 장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는 근대화를 앞두고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여러 세력들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아직 봉건사회의 부족회의에 해당하는 로야 지르가(Loya Jirgah)* 외에 이렇다 할 대의정치 기구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63년, 그 당시 왕인 자히르 샤가 직접 나서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을 주도하게 된다. 상하 양원을 둔 의원내각제를 규정한 새로운 헌법이 1964년 10월 제정되고, 1965년 8~9월 선거가 실시되어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근대화 개혁을 추구하는 지식인과 전통 체제를 고수하려는 종교, 부족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근대화의 한 대안으로서 공산주의는 지식인 사이에서 그 세력을 넓혀갔다. 그 결과 1965년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PDPA)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1978년 4월, PDPA를 지지하는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정권을 수립한다. 이 공산혁명은 그 달의 이름을 따서 ‘샤우르 혁명’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새로운 비극의 막이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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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선 글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에서도 살펴봤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다른 민족과 종교로 구성된 부족사회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부족장들의 회의인 로야 지르가(Loya Jirgah)가 전통적으로 조정자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최근, 아프간 피랍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9일 아프간에서 열리는 ‘지르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파키스탄 정치 지도자와 부족장들의 불참선언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파키스탄과 미국이 테러의 근거지라고 주장해 온 북(北) 와지리스탄 원로들은 파키스탄 정부가 이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강화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르가 참가를 거부했다. 남(南) 와지리스탄 부족장들도 이번 회의에 탈레반이 참여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불참 의사를 밝혔다.

이는 일차적으로 이번 지르가가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친미 정권이 주도하는 반테러 연대 구상 속에 개최되기 때문이며, 전통적으로 친 탈레반 성향을 보여 왔던 파슈툰족 계열 부족들이 이러한 구상에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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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1/물이되는꿈2007. 8. 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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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은 유라시아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땅의 넓이는 65만km2로 한반도의 세 배나 된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파키스탄, 서쪽으로는 이란, 북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과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에 국경선을 접하고 있으며 그 길이는 총 5,500km에 달한다.


제 3세계의 다른 많은 나라들의 경우처럼, 아프가니스탄 역시 지금의 국경선은 문화적이거나 종족적인 경계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다. 19세기 내내 이 지역에서 각축을 벌였던 영국과 러시아, 이 두 제국과 그 사이에 놓인 아프가니스탄간의 국제적 역학구조가 지금의 국경선을 만들었다. 이러한 역학구조 하에서 아프가니스탄은 필연적으로 외세의 자본과 무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역사를 갖게 된다.


19세기 말, 당시 인도를 지배한 영국은 ‘듀런드 라인’이라는 분계선으로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지금의 파키스탄과의 국경)을 획정했다. 또 따뜻한 곳을 찾아 끊임없이 남진했던 러시아의 발길은 영국의 견제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아무 다리야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 러시아와 바로 국경을 맞대는 것을 원치 않아서, 동쪽 끝에 있는 소위 ‘와한 회랑(Wakhan Corridor)'은 영국령 인도와 러시아간의 완충지대로 아프가니스탄의 영토가 되었다. 이 때문에 앞가니스탄은 동쪽 끝이 길쭉하게 나와 마치 나뭇잎 같은 모양이 되었다. 이 와한 회랑의 좁은 끝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은 중국과도 만난다.


이렇듯 주변 강국들의 완충국으로서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체제는 국가와 사회를 이루는 여러 관계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 관계와 종교관계가 그러했다. 주요 부족들과 민족들은 각기 다른 외세와 결탁해 아프가니스탄의 갈등과 내전을 일으켰다.


아프가니스탄에는 2003년을 기준으로 추산해 약 2,8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인구의 절반은 파슈튼족(48%)이고, 그밖에 타지크족(25%), 하자라족(10%), 우즈베크족(8%) 등의 종족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주로 동쪽과 남쪽에 분포하는 파슈툰족이 지난 200여 년간 이 나라를 주도해 왔다. 그중에서도 칸다하르 출신의 두라니계가 중심세력이다. 탈레반도 두라니계 파슈툰족이 주류이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 수니파가 80%로 다수이고, 시아파가 20%를 이루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가 주류인 탈레반은 시아파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지라족를 혹독하게 탄압하고 대규모 살육을 자행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역시 시아파가 주류인 이란은 탈레반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렇듯 각기 다른 민족과 종교간의 헤게모니 다툼과 갈등은 아프가니스탄 근현대사에서 늘 잠재해 왔으며 지금까지 내연하고 있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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