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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판자촌' 마포 염리동 사람들… 마을 이야기 연극 배우되다
오늘 '마포 사는 황부자' 공연
"뉴타운 사업으로 곧 재개발… 동네 사라지는 게 아쉬워…"
"부자가 된 것으로 천심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다. 넌 돈을 담보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있으니 그 죄가 심히 막중하구나!"
포도대장 역을 맡은 배우가 왼손에 대본을 말아쥐고 쩌렁쩌렁한 소리로 대사를 외웠다. 연출자인 극단 민들레의 송인현(55) 대표가 인정사정없이 "컷!"을 외쳤다. "그 부분에서는 위엄이 느껴져야 하니까 목소리를 좀 더 굵게 내 보세요."
29일 오전 10시30분 서울 마포구 염리동 주민자치센터 3층. 82㎡(25평)짜리 방에서 30~70대 염리동 주민 28명과 극단 민들레 소속 연극배우 3명이 '마포 사는 황부자'라는 연극을 연습하고 있었다. 공연 날짜(31일 오후 4시)가 코앞에 닥친 터라, 연습장에는 긴장과 활력이 감돌았다.
'마포 사는 황부자'는 염리동에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소금창고에서 일하던 '황득업'이라는 사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갑부가 된 뒤 백성들을 괴롭히다 복면 쓴 의적에게 재산을 털리는데, 훗날 알고 보니 그 의적이 자기 자식이라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는 줄거리다.
작년 여름, 당시 염리동장이었던 장종환(55) 마포구청 감사담당관이 이 동네 10대 청소년들과 함께 동네 어르신들에게 들은 옛날이야기를 모아 책을 펴냈다. 이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지원을 받아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한 차례 '마포 사는 황부자'를 공연했다. 극단 민들레 배우 7명이 주요 배역을 맡고, 동네 주민 20명이 조연과 단역으로 나섰다. 장 감사담당관은 "주민들 반응이 좋아 올해 또 하게 됐다"며 "올해는 공연장으로 서울 마포아트센터를 빌리고, '황 부자' 역 하나만 빼고 주요 배역을 모두 주민들이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포도대장 역을 맡은 문상원(44·논술강사)씨를 포함해 주민 28명은 지난 8월 염리동 주민자치센터에 '연극배우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은 것을 보고 스스로 찾아왔다.
이방 역을 맡은 조영권(35·어린이집 운영)씨는 "우리 동네는 판잣집 등 서울의 옛모습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며 "몇 년 안에 재개발이 끝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 소중한 옛 이야기들을 이어가기가 힘들 것 같아 연극에 참여할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조씨의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 7명도 '동네 꼬마' 역으로 출연진에 이름을 올렸다. 대사는 없다.
극단 민들레의 박정용(34) 부대표가 '황 부자' 역을 하면서, 주민들의 연기지도를 맡았다. 박 부대표는 "처음 연습을 시작할 때만 해도 주민들이 무대에서 우왕좌왕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맸는데 요즘은 상당히 연기력이 늘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주민자치센터 2층에 휴대용 재봉틀과 옷감을 들고 모여 무대의상과 소품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최고령 주민 배우 김영미(72)씨는 "무대에 선다니 신이 나서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고 말했다. "내 나이가 벌써 70이 넘었어요. 이 늙은이에게 기회를 준 것도 고맙고, 우리 동네 옛날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데 참여한다고 생각하니 힘이 절로 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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