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21/물이되는꿈2007. 8. 10. 17:28

<아래 글은 2007년 8월 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태현 교수의 '미국 책임론의 위험성'이란 기고문에 대한 반론이다.>


김태현 교수는 아프간 피랍 사태에 대한 미국 책임론에 대해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파탄과 사태 해결 책임을 남에게 넘기고 안주하려는 도덕적 파탄의 소산이라며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면에서 김태현 교수 주장의 출발은 옳다. 하지만 사태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책임의 주체에 대한 판단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김태현 교수는 사태의 본질을 ‘납치->석방->또 납치’라는 복잡한 순환구조에서 찾는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미국 정부를 움직여 인질-수감자 교환을 이끌어낸다면, 테러범들은 한국인들을 ‘유용한’ 인질로 인식해 너도 나도 한국인 ‘사냥’에 나서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김태현 교수는 확답을 줄 수 있는가? 탈레반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을 때 다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줄 수 있는가 말이다. 김태현 교수야 말로 사태의 본질을 현상에 귀일시키는 단선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납치->석방->또 납치’라는 순환구조의 맨 앞에는 미국의 점령과 한국의 파병이 있다. 그래서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점령과 파병이 먼저 중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또 다시 이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희생될 수밖에 없다. 앞선 김선일 씨의 죽음과 윤장호 씨의 죽음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물론 김태현 교수는 이에 대해 책임의 소재를 돌림으로써 심리적 위안을 줄지 몰라도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심리적 위안을 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프간의 내전과 테러는 지난 2001년 미국의 점령 이후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성찰 없이, 어떻게 한국인 피랍 사태만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사태의 본질을 이렇게 이해했을 때, 그 책임의 주체는 한결 분명해진다. 미국에게 점령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게다가 탈레반의 요구사항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이 아닌가? 김태현 교수의 말처럼 무고한 인질들을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에도 책임이 있다. 정부는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의 목적을 인도적 차원의 구호 및 진료 그리고 재건이라 밝혀왔다. 하지만 다산·동의부대의 파병연장안에는 그 목적이 “미군 및 동맹군의 기지 운용지원”, “미군 및 동맹군에 대한 진료활동”이라고 분명히 서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파견부대의 작전 운용에 관한 통제권한 역시 현지 사령관, 즉 미군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결국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는 정부가 밝힌 인도적 차원의 구호와 진료 그리고 재건과는 거리가 먼, 미국이 주도한 침공과 점령의 동조부대임이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파병이 없었더라면 이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단 말인가?”라며 파병원인론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번 사태에 대한 현상적인 측면만을 근거한 주장이다. 탈레반이 자행하고 있는 테러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한국 정부의 파병의 목적과 성격을 따져본다면, 이번 사태는 결코 한국의 파병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피랍 직후 탈레반이 한국군 철군이라는 요구조건을 내 걸었던 점을 상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미국의 책임과 적극적 역할을 주장하는 것은 탈레반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탈레반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테러는 올바른 저항 수단이 될 수 없다. 탈레반은 지금이라도 즉시 한국인 인질을 석방해야 한다.


아프간 피랍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다. 피랍자들의 안전과 무사귀환을 다시 한 번 염원한다.


〈조영권 / 한국사회당 부대변인〉


아래 글은 김태현 교수의 기고문입니다.

-----

[기고]미국 책임론의 위험성
입력: 2007년 08월 08일 17:59:48
 
 
 
힘없고 무고한 사람을 인질로 잡고 돈, 기타 보상을 요구하는 납치는 지극히 비열한 범죄다. 그리고 비열한 만큼이나 해결이 어렵다. 무고한 인질을 무사히 구출하는 것이 첫째다. 그처럼 비열한 행위를 처벌하여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둘째다. 그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셋째다. 급하기로는 첫째가 가장 급하고 중하기로는 셋째가 가장 중하다. 둘째와 셋째는 동전의 양면이다.
문제는 첫째와 셋째가 서로 충돌한다는 데 있다. 범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인질을 구출하면 범인은 같은 범죄를 거듭하고 모방범죄까지 조장할 우려가 있다. 게다가 요구를 들어준다고 무사히 구출한다는 보장도 없다. 비열한 범인에게 신뢰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인질을 살해함으로써 완전범죄를 꾀할 수도 있다. 이 어려움이 멜깁슨이 주연한 영화 “랜섬”에 극적으로 표현돼 있다.


아프간의 탈레반 세력이 우리 국민 23명을 인질로 잡아 그중 2명을 살해하고 나머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 인질 문제 해결의 어려움을 반영하듯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고 가족과 국민들의 안타까움도 극에 달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일부 정치인들이 미국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그들의 주장은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파탄과 사태 해결 책임을 남에게 넘기고 안주하려는 도덕적 파탄의 소산이다.


미국 책임론은 대체로 세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는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와 협상할 수 없다는 ‘교조적’ 태도를 고집함으로써 협상을 통한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미국, 특히 부시 행정부가 ‘침략’ 전쟁을 자행하고 한국의 참전을 ‘강요’하여 테러리스트에게 명분을 주고 한국인들이 대상이 되게 했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미국의 힘이 너무 강하여 테러리즘과 같은 비대칭적 폭력이 양산되고 미국 정책의 오만이 그것을 더욱 조장한다는 주장이다.


셋째 주장은 지나친 일반론이어서 이 일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도 책임의 소재를 돌림으로써 심리적 위안을 줄지 몰라도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 주로 첫째가 비난의 대상인데, 그것이 지적으로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도덕적으로 이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극히 위험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탈레반이 나름대로 ‘정당한’ 목표를 추구한다면 수단으로서 테러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도덕관을 가진다. 탈레반과 상해 임시정부를 비교한 해괴망측한 발상도 그래서 나왔다. 임정이 존경을 받는 것은 독립추구라는 목적의 정당성 때문만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폭력에 호소하더라도 결코 무고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수단의 도덕성 때문이다.


지적으로 이들은 문제의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미국에 귀일시키는 단선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설사 우리의 외교적 노력으로 미국이 아프간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인질-수감자 교환을 이끌어낸다고 치자. 그것이 한국 외교의 개가일까? 미국을 무시하고 독자적 외교를 펼치는 프랑스는 아프간 정부를 압박하여 인질-수감자 교환에 성공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이 유별나게 자주 인질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성공’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그들 목적을 위해 ‘유용한’ 인질이라고 알려지면 테러범들은 너도 나도 한국인 ‘사냥’에 나설 것이다.


세계를 무대로 뛰어야 살아 남고 성장하는 한국이다. 해외의 한국인들이 인질범들의 ‘사냥감’이 되고, 그로 인해 한국인들의 대외 활동이 위축된다면, 그리하여 나라의 생존과 발전이 타격을 받는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납치범에게 인질을 잡고 있어봤자 얻는 게 없고 잃는 것만 커진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납득시키는 것이 사태해결의 핵심이다. 단 그들에게 체면이 있다면 그것을 살려주는 것도 외교적 지혜다. 과거 서희 장군의 외교가 그랬던 것처럼.


〈김태현 /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Posted by altern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