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
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2. 근대국가의 수립과 공산정권의 등장
3. 소련의 침공과 지하드, 그리고 아프간 내전
4. 탈레반의 등장과 집권
5. 벼랑 끝에 선 탈레반,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전쟁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는 탈냉전 이후 줄곧 서방의 새로운 공적(公敵)이 되어왔다.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자, 미국은 어떠한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오사마 빈 라덴이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국제 사회에 보도했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한 마디로 그들이 테러리스트이고 억압자라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이미지를 조장해 왔다. 그런데 우리는 탈레반에 대해 이런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물론 여성인권 등 그들이 스스로 이러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봄이다. 당시 탈레반의 지도자였던 물라 오마르는 칸다하르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신게사르 마을에서 작은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군에 저항하는 무자헤딘으로 게릴라전에 참전하여 네 번이나 부상을 당했으며, 이 때문에 오른쪽 눈이 멀었다. 이 무렵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 무자헤딘은 분열되어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칸다하르 일대를 지배한 무자헤딘 군벌들의 횡포는 극에 달해 있었다.
탈레반의 등장과 관련해 전해지는 사건이 있다. 무자헤딘 지휘관이 신게사르 마을에서 두 명의 소녀를 납치해 강제로 머리를 깎고 겁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오마르가 30여 명의 마드라사 학생들을 이끌고 무자헤딘을 공격해 소녀들을 구출하고 무자헤딘 지휘관을 탱크의 포신에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이러한 일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전설이 되어 오마르가 이끄는 무리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이들은 문자 그대로 ‘(마드라사의)학생’이라는 의미의 ‘탈레반’이라 불리게 된다. 탈레반 혹은 탈리반(taliban)은 ‘탈립(talib)’의 복수형으로, ‘탈립’은 원래 ‘구도자(seeker)'라는 뜻이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을 올바로 세우는 것을 기치로 내세웠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많은 마드라사 학생들이 오마르의 무리에 가담했다. 파키스탄에서 온 마드라사 학생들은 대부분 아프간 난민들이었으나, 이슬람원리주의의 이상에 따라 새로운 지하드에 동참하려는 파키스탄 젊은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탈레반 운동은 이슬람이 단순히 개인적 신앙을 위한 토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18세기의 초기 이슬람 운동의 전통과 유사하다. 그들에게 국가란 이슬람의 가치가 집단적으로 체현된 것이며, 국가의 지속은 시민들의 이러한 이슬람의 가치들을 지지하고 지켜내는 데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초기 이슬람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이슬람 운동은 19세기부터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려 했던 영국의 시도와 러시아로부터의 압력과 간섭에 저항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성격을 더욱더 순수한 이슬람에 근접하도록 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왔다.
탈레반의 성장에는 파키스탄의 은밀한 지원이 있었다. 파키스탄의 거상(巨商)들은 퀘타에서 칸다하르와 헤라트를 거쳐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인 아슈하바드까지, 파키스탄과 북쪽의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로를 뚫는데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교역로가 통과하는 아프가니스탄 남부, 특히 칸다하르 일대의 치안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조건이었다.
이러한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고 탈레반은 칸다하르를 함락하게 된다. 칸다하르를 함락함으로써 아제 탈레반은 소련군이 남기고 간 헬리콥터와 미그기까지 갖춘 무시하지 못할 무장 세력으로 성장했다. 탈레반은 현존하는 썩은 권력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구원하고 그 위에 이슬람과 일치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칸다하르에 질서를 세우는데 뛰어난 성과를 거움으로써 상당한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탈레반은 여기서 기세를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헤라트를 향해, 북쪽으로 카불을 향해 파죽지세로 올라갔다. 그리고 1996년 9월, 수도 카불로 무혈 입성하였다.
탈레반은 그야말로 신의 가호를 받는 불패의 전사인 듯했다. 탈레반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을 바로 세우겠다는 이상에 불타고 도덕적 우월감으로 가득 찬 지도자와 어린 전사들이 그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탈레반의 군사적 성공은 결코 우연이나 신의 가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정되고 이를 통해 중앙아시아까지 교역로를 열고자 했던 파키스탄의 정보국은 조직적으로 탈레반의 주축을 훈련시켜 침투시키고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마침 칸다하르 일대의 아프가니스탄 남부 주민들은 공산정권이나 소련군에 못지않게 고통을 안겨준 부패하고 타락한 무자헤딘 군벌들에게 몇 년째 시달리던 터라 탈레반의 등장을 환영했다.
미국 역시 탈레반의 성장에 기여했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을 때, 대사관 직원들이 1년 동안 인질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 바 있는 미국에게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와 수니파가 다수인 탈레반이 적대관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탈레반을 지원할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석유에 있었다. 미국의 석유회사인 UNOCAL(유노컬)은 아프가니스탄을 관통하여 구(舊)소련 령 중앙아시아의 유전에서 파키스탄과 아라비아 해까지 송유관을 놓으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파키스탄과 다른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안정이 확보되는 것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탈레반의 등장을 반기게 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건설되었거나, 추진충인 석유와 가스 수송관들, 사진출처 : 경계를 넘어 http://www.ifi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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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레반 운동의 목표는『알-마잘라』의 1996년 10월 23일자 기사인 탈레반 대변인 물라 와킬 아흐메드와의 인터뷰에 잘 요약되어 있다. 탈레반 운동이 어떻게, 왜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무자헤딘 당들이 1992년 권력을 잡은 이후 아프가니스탄 인민들은 나라에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카불에서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특히 칸다하르에서 일부 지역 지도자들은 무장범죄단을 형성하여 서로 싸우기 바빴다. 부패와 절도가 횡행했고 도처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여성들은 공격받고, 강간당하고, 죽어 나갔다. 그래서 이러한 일이 자행된 후에 한 종교 학교의 학생 단체 하나가 칸다하르 주의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이 지도자들에 맞서 봉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우리는 칸다하르에 당도하기 전에 몇몇 주요 지역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이전의 지도자들은 결국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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