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21/물이되는꿈2007. 8. 8. 12:59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


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2. 근대국가의 수립과 공산정권의 등장
3. 소련의 침공과 지하드, 아프간 내전
4. 탈레반의 등장과 집권
5. 벼랑 끝에 선 탈레반,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전쟁



19세기 초 아프가니스탄은 왕권을 둘러싼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사이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열강들의 각축은 더욱 고조된다.


영국은 인도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이 다른 열강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경계했다. 특히 프랑스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로 넘어올 것을 두려워했다. 19세기 초부터 강력하게 남진정책을 펼치고 있었던 러시아는 1828년 투르크만치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란으로부터 아르메니아를 빼앗고 사실상 이란을 손에 넣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에게 아프가니스탄의 전략적 중요성은 커지게 된다. 결국 영국은 1838년과 1879년, 1919년 총 3차례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게 된다.


3차 침공 직전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 두 가지 현안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19세기 말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를 나눈 ‘두란드 라인(Durand Line)’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인도 식민지정부가 획정한 이 국경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이버르, 페샤와르, 스와트 등 주요 파슈튼족의 거주지가 영국령 인도로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국령 인도의 파슈툰 거주 지역에서는 소요가 끊이지 않았으며 20세기 말까지 이 문제는 계속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3차례의 전쟁 끝에 양국은 영국-아프가니스탄 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도 두란드 라인을 통해 갈라진 영국령 인도 내에 있는 파슈툰 부족에 대한 관할권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그 결과 이 문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 분할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결국 파키스탄은 파슈툰 지역을 포함한 채 독립하게 된다.

 

파키스탄의 등장은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주변 세력의 역학관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과 파슈툰족 거주문제로 여러 차례 갈등을 빚어 때로는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내륙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에게 교역로의 차단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가져왔다. 결국 1961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곤경에 처한 아프가니스탄에게 소련은 어느 나라보다 좋은 우방이었다. 소련은 관대하게 물자를 공급하고 저렴한 이자로 차관을 제공했다. 군사적으로도 다량의 소련제 무기를 지원하고 많은 장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는 근대화를 앞두고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여러 세력들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아직 봉건사회의 부족회의에 해당하는 로야 지르가(Loya Jirgah)* 외에 이렇다 할 대의정치 기구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63년, 그 당시 왕인 자히르 샤가 직접 나서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을 주도하게 된다. 상하 양원을 둔 의원내각제를 규정한 새로운 헌법이 1964년 10월 제정되고, 1965년 8~9월 선거가 실시되어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근대화 개혁을 추구하는 지식인과 전통 체제를 고수하려는 종교, 부족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근대화의 한 대안으로서 공산주의는 지식인 사이에서 그 세력을 넓혀갔다. 그 결과 1965년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PDPA)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1978년 4월, PDPA를 지지하는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정권을 수립한다. 이 공산혁명은 그 달의 이름을 따서 ‘샤우르 혁명’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새로운 비극의 막이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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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선 글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에서도 살펴봤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다른 민족과 종교로 구성된 부족사회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부족장들의 회의인 로야 지르가(Loya Jirgah)가 전통적으로 조정자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최근, 아프간 피랍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9일 아프간에서 열리는 ‘지르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파키스탄 정치 지도자와 부족장들의 불참선언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파키스탄과 미국이 테러의 근거지라고 주장해 온 북(北) 와지리스탄 원로들은 파키스탄 정부가 이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강화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르가 참가를 거부했다. 남(南) 와지리스탄 부족장들도 이번 회의에 탈레반이 참여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불참 의사를 밝혔다.

이는 일차적으로 이번 지르가가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친미 정권이 주도하는 반테러 연대 구상 속에 개최되기 때문이며, 전통적으로 친 탈레반 성향을 보여 왔던 파슈툰족 계열 부족들이 이러한 구상에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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