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21/물이되는꿈2007. 8. 13. 15:03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

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2. 근대국가의 수립과 공산정권의 등장
3. 소련의 침공과 지하드, 그리고 아프간 내전
4. 탈레반의 등장과 집권
5. 벼랑 끝에 선 탈레반,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전쟁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는 탈냉전 이후 줄곧 서방의 새로운 공적(公敵)이 되어왔다.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자, 미국은 어떠한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오사마 빈 라덴이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국제 사회에 보도했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한 마디로 그들이 테러리스트이고 억압자라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이미지를 조장해 왔다. 그런데 우리는 탈레반에 대해 이런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물론 여성인권 등 그들이 스스로 이러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봄이다. 당시 탈레반의 지도자였던 물라 오마르는 칸다하르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신게사르 마을에서 작은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군에 저항하는 무자헤딘으로 게릴라전에 참전하여 네 번이나 부상을 당했으며, 이 때문에 오른쪽 눈이 멀었다. 이 무렵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 무자헤딘은 분열되어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칸다하르 일대를 지배한 무자헤딘 군벌들의 횡포는 극에 달해 있었다.


탈레반의 등장과 관련해 전해지는 사건이 있다. 무자헤딘 지휘관이 신게사르 마을에서 두 명의 소녀를 납치해 강제로 머리를 깎고 겁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오마르가 30여 명의 마드라사 학생들을 이끌고 무자헤딘을 공격해 소녀들을 구출하고 무자헤딘 지휘관을 탱크의 포신에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이러한 일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전설이 되어 오마르가 이끄는 무리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이들은 문자 그대로 ‘(마드라사의)학생’이라는 의미의 ‘탈레반’이라 불리게 된다. 탈레반 혹은 탈리반(taliban)은 ‘탈립(talib)’의 복수형으로, ‘탈립’은 원래 ‘구도자(seeker)'라는 뜻이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을 올바로 세우는 것을 기치로 내세웠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많은 마드라사 학생들이 오마르의 무리에 가담했다. 파키스탄에서 온 마드라사 학생들은 대부분 아프간 난민들이었으나, 이슬람원리주의의 이상에 따라 새로운 지하드에 동참하려는 파키스탄 젊은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탈레반 운동은 이슬람이 단순히 개인적 신앙을 위한 토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18세기의 초기 이슬람 운동의 전통과 유사하다. 그들에게 국가란 이슬람의 가치가 집단적으로 체현된 것이며, 국가의 지속은 시민들의 이러한 이슬람의 가치들을 지지하고 지켜내는 데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초기 이슬람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이슬람 운동은 19세기부터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려 했던 영국의 시도와 러시아로부터의 압력과 간섭에 저항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성격을 더욱더 순수한 이슬람에 근접하도록 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왔다.


탈레반의 성장에는 파키스탄의 은밀한 지원이 있었다. 파키스탄의 거상(巨商)들은 퀘타에서 칸다하르와 헤라트를 거쳐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인 아슈하바드까지, 파키스탄과 북쪽의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로를 뚫는데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교역로가 통과하는 아프가니스탄 남부, 특히 칸다하르 일대의 치안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조건이었다.


이러한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고 탈레반은 칸다하르를 함락하게 된다. 칸다하르를 함락함으로써 아제 탈레반은 소련군이 남기고 간 헬리콥터와 미그기까지 갖춘 무시하지 못할 무장 세력으로 성장했다. 탈레반은 현존하는 썩은 권력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구원하고 그 위에 이슬람과 일치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칸다하르에 질서를 세우는데 뛰어난 성과를 거움으로써 상당한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탈레반은 여기서 기세를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헤라트를 향해, 북쪽으로 카불을 향해 파죽지세로 올라갔다. 그리고 1996년 9월, 수도 카불로 무혈 입성하였다.


탈레반은 그야말로 신의 가호를 받는 불패의 전사인 듯했다. 탈레반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을 바로 세우겠다는 이상에 불타고 도덕적 우월감으로 가득 찬 지도자와 어린 전사들이 그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탈레반의 군사적 성공은 결코 우연이나 신의 가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정되고 이를 통해 중앙아시아까지 교역로를 열고자 했던 파키스탄의 정보국은 조직적으로 탈레반의 주축을 훈련시켜 침투시키고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마침 칸다하르 일대의 아프가니스탄 남부 주민들은 공산정권이나 소련군에 못지않게 고통을 안겨준 부패하고 타락한 무자헤딘 군벌들에게 몇 년째 시달리던 터라 탈레반의 등장을 환영했다.


미국 역시 탈레반의 성장에 기여했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을 때, 대사관 직원들이 1년 동안 인질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 바 있는 미국에게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와 수니파가 다수인 탈레반이 적대관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탈레반을 지원할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석유에 있었다. 미국의 석유회사인 UNOCAL(유노컬)은 아프가니스탄을 관통하여 구(舊)소련 령 중앙아시아의 유전에서 파키스탄과 아라비아 해까지 송유관을 놓으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파키스탄과 다른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안정이 확보되는 것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탈레반의 등장을 반기게 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건설되었거나, 추진충인 석유와 가스 수송관들, 사진출처 : 경계를 넘어 http://www.ifi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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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레반 운동의 목표는『알-마잘라』의 1996년 10월 23일자 기사인 탈레반 대변인 물라 와킬 아흐메드와의 인터뷰에 잘 요약되어 있다. 탈레반 운동이 어떻게, 왜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무자헤딘 당들이 1992년 권력을 잡은 이후 아프가니스탄 인민들은 나라에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카불에서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특히 칸다하르에서 일부 지역 지도자들은 무장범죄단을 형성하여 서로 싸우기 바빴다. 부패와 절도가 횡행했고 도처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여성들은 공격받고, 강간당하고, 죽어 나갔다. 그래서 이러한 일이 자행된 후에 한 종교 학교의 학생 단체 하나가 칸다하르 주의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이 지도자들에 맞서 봉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우리는 칸다하르에 당도하기 전에 몇몇 주요 지역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이전의 지도자들은 결국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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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1/물이되는꿈2007. 8. 9. 16:40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기원과 역사


1.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2. 근대국가의 수립과 공산정권의 등장
3. 소련의 침공과 지하드, 그리고 아프간 내전
4. 탈레반의 등장과 집권
5. 벼랑 끝에 선 탈레반,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전쟁



이슬람주의자들의 출발점은 이슬람의 일상경험, 즉 하나의 문화적 형태로 해석된 이슬람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통찰력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귀의는 종교적 신앙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정치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울레마는 사회 내의 관계의 토대 위에 있는 정치를 법에 의해 수립된 것으로 정의했다. 국가는 무슬림 사회 내에서 정의가 작동되게 하는 수단이다. 정치사상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무슬림 혹은 무슬림 공동체이다. 정치는 법이 확장된 것이다.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사회의 본질은 국가의 본질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Roy, 1986: 80)



공산정부는 토지 재분배와 고리대금의 폐지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아프가니스탄의 전통적인 사회관습과 생활현실을 도외시한 채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도시 카불에서는 도시 엘리트와 지식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숙청과 투옥이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민심이 이반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산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무기를 들고 공산정권에 저항하는 지하드(Jihād, 聖戰)*에 동참하여 무자헤딘이 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소요와 봉기기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이제 갓 들어선 공산정권은 위기를 맞게 된다.


소련으로서는 이러한 사태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소련은 결국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로 결정하고 1979년 12월 카불 내 주요 거점을 장악하고 다룰라만 궁을 공격했다.


소련은 카르말을 대통령으로 앉히고 유화정책을 폈다. 동시에 소련을 모델로 한 아프가니스탄의 소비에트화를 꾀했다. 하지만 무자헤딘의 저항은 갈수록 거세졌다.


아프가니스탄에 별 관심이 없었던 미국은 소련이 침공하자 갑자기 이 나라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페르시아 만의 산유지가 돌연 소련의 공격권 안에 훨씬 가까이 들어오게 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대통령 카터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평화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로써 미국은 공산정권 및 소련군과 무자헤딘간의 전투가 격화되고 장기화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무자헤딘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미국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이슬람국, 또 소련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중국이 무자헤딘의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소련은 처음에 불과 서너 달이면 아프가니스탄 내의 소요와 무장봉기를 진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소련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전을 편 무자헤딘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고 해가 흐를수록 무자헤딘의 저항은 점점 거세졌다.


1984년 브레즈네프가 죽고 이듬해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 소련은 몇 년 동안 큰 짐이 되어온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고 1988년 4월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었다. 소련은 그 해 5월 철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2월 마지막 부대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소련군이 물러나면 나지불라 정권이 곧 무너질 것으로 보였으나, 나지볼라는 이때부터 몇 년간 카불을 지키며 건재했다. 소련이 아프간 정부군에게 많은 무기를 넘겨주고 군사지원을 계속했기 때문이며, 무자헤딘 여러 정파가 단합하기보다 서로 주도권 싸움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2년 1월 러시아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하기로 합의하고 파키스탄도 이에 따르자, 대세는 현격하게 무자헤딘 쪽으로 기울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4월 28일 무자헤딘 지도자들로 구성된 ‘이슬람 지하드 위원회’가 카불에 입성하여 아프가니스탄이슬람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카불을 둘러싼 무자헤딘 여러 파간의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다. 그 와중에 1995년, 탈레반이라는 신비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며 결국 탈레반은 1996년 카불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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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여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다. 그런데 지하드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프가니스탄이 세속 세력에 의해 훼손되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이슬람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어 상당수 주민들이 이웃 이슬람 국가들로 탈주하는 상황에서 정당화된다. 서기 622년 무함마드가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해진 박해에 맞서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피한 사실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 권리에 대한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전례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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