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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07 이스라엘의 자위권 논리는 학살 이데올로기다
  2. 2008.12.30 아, 팔레스타인!
2010.6.21/물이되는꿈2009. 1. 7. 22:01


한 아이가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부상을 당한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아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끝 모를 슬픔에 잠겨있다. 그 눈에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역사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다. 만약 이 아이가 세상에 대한 증오를 끝내 떨쳐 버리지 못한다면 결국 그는 어린 전사가 되어 세상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될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이스라엘 대사관 앞 시위 때문인지 이갈 카스피 주한 이스라엘 대사가 입을 열었다.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로켓 공격의 공포를 상상해 보라”는 글을 남긴 것이다. 이 와중에 이런 글을 실은 중앙일보도 참 대단하다.


이갈 카스피 주한 이스라엘 대사 주장의 핵심은 이렇다.

“어떤 국가의 정부도 자국민의 일상이 공격에 노출돼 있는 상황을 두고만 볼 수 없다. 자기방어는 모든 국가의 고유한 권리다. 이는 유엔헌장에도 명시돼 있으며 국제법의 토대다. 침략에 대한 적절한 대응의 필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의 침공이 자위권이란 말이다. 팔레스타인의 로켓포 공격이 먼저 있었으니 이스라엘은 그들의 국민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참 무서운 논리다. 그 속에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슬픔과 증오에 관한 그 어떤 성찰과 자기반성도 없다.


유엔헌장 51조는 자위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유엔회원국에 대하여 무력공격이 발생한 경우,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 개별적 또는 집단적 지위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지 아니한다.”

자위권은 외국으로부터의 불법적 침해에 대해서, 자기나라 또는 자기 나라 국민을 위하여 국제법상 인정되는 국가 간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렇다면 선제적 불법 침해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갈 카스피 대사의 논리대로 하마스의 로켓포 공격이 선제적 불법 침해라면, 그전에 벌어진, 이른바 제3차 중동전쟁이라 불리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지지구와 서안지구 침략과 점령, 그리고 계속된 분리장벽과 봉쇄정책은 과연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선제공격과 자위권 행사, 그리고 선제적 자위권까지 전쟁의 정당성에 관한 국제법적인 논란은 끊이지 않고 발생해왔다. 구체적인 기준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논란 속에는 언제나 정치적이고 역학적인 논리가 개입되어 왔다. 그 속에서 강대국들은 그들의 선제공격과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자위권 논리를 활용해왔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지난 1837년 벌어진 <캐롤라인 호 사건>이다. 자위권 논란과 관련해 오늘날까지 고전적 기준으로 등장하는 이 국제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어떻게 자위권의 기준을 자의적으로 활용해 왔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캐나다 독립투쟁 세력은 미국과의 경계인 나이아가라 강의 작은 섬인 네이비섬에 몰래 병력을 집결시켜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고 미국 선박인 캐롤라인 호를 이용해 미국의 슈롯서항에서 무기와 탄약을 가져오려 했다.

이를 눈치 챈 영국군이 슈롯서항으로 병력을 투입해 캐롤라인 호를 방화하고 나이아가라 폭포 속으로 침몰시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때 캐롤라인 호에는 미국인이 잠을 자고 있었다. 미국인의 희생은 결국 이 사건을 미국과 영국의 외교 분쟁으로 만들었다.

영국은 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정당한 전쟁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 국무장관 다니엘 웹스터는 “합법적으로 자위권이 행사되기 위해서는 가해진 공격이 즉각적·압도적이며, 그러한 공격에 대해 대응되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이 있고, 공격행위와 그에 대응한 자위권행사 간에 비례성이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태는 어떤가. 이스라엘의 침공은 과연 자위권 발동의 고전적인 기준인 웹스터의 근거를 충분히 충족하고 있는가. 6개월간의 휴전이 이제 막 끝난 지금의 상황이 정말 즉각적이고 압도적이며, 지상군을 투입할 정도까지 불가피했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이 벌이고 있는 학살이 자위권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입을 피해에 준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인정하며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는 유엔 안보리 성명 채택에 반대했다. 똑같은 자위권에 대해 1837년 미국은 보다 엄격한 잣대를 제시했고, 2009년 미국은 보다 관용적인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말하는 자위권은 가면이다. 그리고 그 가면에 속을 세계 시민은 없다. 우리는 그 가면 속에 숨겨진 이스라엘의 파렴치한 낯짝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출처> ‘나란히 가지 않아도’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beggarsoul?Redirect=Log&logNo=1003954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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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6.21/물이되는꿈2008. 12. 30. 17:12



1. ‘후세인-맥마흔 선언’과 ‘밸푸어 선언’, 그리고 ‘사이크스피코협정’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 아랍인, 유대인과 각각 서로 모순되는 약속을 했다. 당시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랍인들에게 영국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전쟁 후 아랍인 국가의 독립을 약속했다.(후세인-맥마흔 선언) 그리고 유대인에게는 전쟁 비용 조달을 대가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밸푸어 선언) 뿐만 아니라 프랑스, 러시아와 중동 지역을 전후 분할 관리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사이크스피코협정) 현재 팔레스타인의 국경은 이들 협정에 기초된다.


2. 시오니즘

팔레스타인 분쟁의 원류가 영국의 외교 정책이라면 문제를 확대한 것은 ‘시오니즘’이다. 시오니스트는 구약성서의 내용에 기초해 ‘팔레스타인은 신이 유대인에게 내어준 땅’이라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유대인의 선조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팔레스타인’을 줄 것을 약속했고(창세기) 모세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출애굽기) 기원전 10세기 다윗이 팔레스타인을 통일하고 왕국을 건설했으나 왕국이 몰락한 후 팔레스타인은 여러 나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유대인들은 기원전 70년 로마 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다. 유대인들은 언젠가는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세계 각지로 흩어진다.


3. 홀로코스트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자 밸푸어 선언의 실현을 믿은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은 유대인들의 이주를 재촉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의 이주는 자연스럽게 현지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과의 대립을 낳게 되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는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4. 유엔의 영토 분할

1947년 11월 29일 뉴욕.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유대국가(영토의 56%)와 아랍국가(44%)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국제관리체제 하에 두기로 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전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분할안은 팔레스타인의 절반 이상을 유대인의 것으로 만들었다.


5. 이스라엘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바로 다음날 주변의 아랍국가들(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제1차 중동전쟁) 그러나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이집트, 요르단과 나눠먹고 국토 면적을 3분의 1가량 늘렸다. 그리고 백만에 가까운 팔레스타인들은 난민이 되어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지지구 등으로 유입되었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의 전쟁은 그 후로도 계속된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를, 요르단으로부터 요르단 강 서안지구를 4일 만에,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2일 만에 빼앗았다.

유엔은 이스라엘군의 점령지 철수, 이 지역 모든 국가의 생존권 해결 등을 포함하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를 채택했지만, 아랍 측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게 된다며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6. 인티파다Intifada와 독립선언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등 전쟁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1987년 12월. 이스라엘에 의한 점령과 전쟁에 반발한 팔레스타인의 민중봉기가 가자지구에서 발생해 요르단 강 서안지구까지 확대되었다.(제1차 인티파다)

그리고 1988년 요르단이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던 요르단 강 서안 지구의 권리를 포기하자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은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독립을 선언하고 동시에 제3차 중동전쟁 당시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수용을 표명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제3차 중동전쟁 이전의 국경선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7. 오슬로조약

1990년 걸프전쟁을 통해 중동에 대해 더욱 큰 영향력을 갖게 된 미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1991년 10월 마드리드에서 중동평화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1993년 9월.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팔레스타인 잠정자치 공동선언(오슬로조약)’을 조인했다.

오슬로조약은 이스라엘이 제3차 중동전쟁에서 점령한 지역(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서 철수하고 PLO가 향후 5년간 잠정자치를 실시하며 그 기간 동안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최종적인 지위를 최종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1994년 7월 야세르 아라파트를 수반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출범했다.

그러나 1995년 11월 4일 이스라엘 내의 오슬로조약 반대파가 라빈 총리를 암살했고 후임총리인 벤야민 네탄야후(1996년~1999년), 에후드 바라크(1999년~2000년)가 점령지 반환을 거부함에 따라 오슬로조약은 이행되지 않았다.


8. 최종지위협정

그리고 2000년 7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최종지위협정 체결을 위한 교섭이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렸으나 결국 결렬되고 만다. 예루살렘이 수도임을 주장하는 이스라엘과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팔레스타인의 입장이 충돌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 우파 리쿠드당의 지도자 샤론이 수백 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동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교의 성지 ‘하람 알 샤리프’ 방문을 강행했다. 이 도발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치안부대의 충돌은 곧 팔레스타인 자치구 전역으로 확대되었다.(제2차 인티파다)


9. 분리장벽

2001년 3월 총리로 선출된 아리엘 샤론은 “1948년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천명했다. 이듬해 자살테러가 증가한다는 핑계로 서안지구를 재점령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기반시설을 파괴하고 대규모 분리장벽을 건설하게 된다.

2004년 7월 9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이 장벽을 불법시설로 간주하고 철거를 명령했고 같은 달 20일 유엔 총회가 찬성 150표, 반대 6표, 기권 10표로 동일한 결정을 내렸다.

2005년 9월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점령을 종식하고 철수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영토는 더 줄어들었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정착촌 4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이스라엘에 합병되었다.




10. 하마스

1987년 말에 창설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에 대한 교육과 의료 등 사회활동을 꾸준히 벌였고 그 결과 국민들로부터 폭 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라이벌 파타당을 누르고 승리하게 된다.

2007년 6월, 하마스는 이스라엘 정책을 둘러싸고 대립하던 파타와의 연립내각에서 끝내 탈퇴하고 무력으로 가자지구를 장악했다. 애초 하마스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하는 이스라엘은 다시 가자지구의 모든 통로를 봉쇄했고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무혈충돌은 계속되었다.

2008년 12월 27일. 결국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6개월간 휴전을 끝내자마자 팔레스타인 가지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참고자료>
한눈에 보는 세계분쟁지도, 마스다 다카유키, 해나무, 2002년
르몽드 세계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휴머니스트, 2008

<사진 출처>
올리브나무
http://pal.or.kr/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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